광동성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한 3년 전에 어느 카페에 올린 글인데, 여러 군데 돌고 있어서 나도 조금 놀랐다. 중국, 특히 광동성을 이해 하는 데 얼마간 도움은 된 것 같다. 시간이 나면, 오류가 있는 부분 수정하고, 광동성의 음식 등 다른 부분에서 대해서도 포스팅 하겠다.>

광동성에는 어떤사람들이 살고있을까?
 
1.

제목을 쓰고 보니, 좀 이상하다. 광동성도 다른 곳과 마찬 가지로 벼라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제는 이 벼라별 사람들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이다. 중국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이들을 분류해 보기로 하자. 광동성도 다른 중국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보통화 혹은 국어라 불리는 표준어가 공식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광동성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방언의 영향력이 지대하며, 이 방언에 따라 인간관계 혹은 친교가 맺어지고, 방언권에 따라서 사람들과 지역색도 확연히 구분된다.

광동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광동성의 방언은 광동화가 아니냐고 묻는다. 흔히 영어로 cantonese라고 표기되는 광동화는 사실 광동성 전체의 방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광부화라고 불리는 방언을 편의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광동성에서 사용되는 방언을 크게 세가지 혹은 네가지로 나누는 데, 세 가지로 나누면 광부화,객가화, 복로화, 네 가지로 나누면 복로화를 다시 조산화와 뇌주화로 나눈다.

광동성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지역이 옛날 백월이라 불리던 민족의 중심지였음을 안다. 그런데, 지금 그 많던 백월족은 다 어디에 갔는 지, 이웃하는 광서장족자치구나 호남성과 비교해 볼 때 소수민족 비율이 아주 낮고, 인구의 절대 다수는 한족이다. 이것은 광동성에 사는 사람들을 특징짓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왜 광동성의 방언들은 보통화와 그렇게 많이 다른가? 광동성 내 방언들 사이에도 왜 서로 소통이 안 되는가? 광동성은 '식재광동'이라 하여 왜 그토록 많은 요리의 종류와 재료가 있는가? 광동성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왜 중앙정부와 자주 충돌했는가?광동성 사람들은 왜 타지역사람보다 외래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가? 이런 광동성을 특징짓는 여러 의문들은 실은 위의 언급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광동성은 끓임없이 북방 한족과 남방토착민족간의 혼융이 진행되어 온 지역이라는 것이다.

2.
  광동성에 진행된 끓임없는 민족간 통합과 혼융은 항상 한족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되었고, 많은 소수민족들의 흔적들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소위 일컫는 광동성 내 한족 간의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양한 편차를 통해서, 우리는 이 역사적 통합과정의 흔적들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광동화라 불리는 광부화가 오늘날 광동지역의 지배적인 방언으로 자리잡는 과정도 자연적인 한족 인구의 증가와 함께 진행된인위적인 정치,군사적인 통합과정과 무관치 않다. 광동성에 한족이 처음 자리잡은 것은 한 무제 시절 10만 병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정벌을 행한 것부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지금의 광부인이라 일컫는 한족의 부류는 이 시절 정착하여 남은 한족과 토착민족의 혼혈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광부화가  본격적으로 광동성과 광서자치구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광조우가 송대부터 이 지역의 행정중심이 되고 부터이다.

광동 지역의 방언사용지역을 간략하게 구분해 보면 남쪽 심천에서 , 동관, 광주,청원을 잇는 선을 경계로 동쪽은 월동지역, 서쪽은 월서로 나누고, 이 월동의 내륙지역은 객가어가,해안지역은 조산어가 사용되고, 월서지역은 해남도와 근접한 뇌주반도의 뇌주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부화를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우리 카페 회원들이 살고 있는 동관도 일종의 객가인과 광부인의 경계지역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동관 동쪽의 혜주 역시 객가인이 주류이지만, 광부인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심천 동부 해안의 산미지역은 실은 조산화라기보다 광부화에 가까운 방언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보다는 월동의 내륙 매주(매현)을 중심으로 객가인이, 조주와 산두를 중심으로 조산인이, 광동 전 지역에 광부인이 섞여 산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동관지역의 경계적인 성격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 중국의 국부로 일컫어지는 손문의 원적이 동관의 손가라는 설이 유력하다. 손문은 본시 광부화 지역인 월서의 중산 출신인 데, 그는 평생 광부화를 모어로 사용했고, 객가화를 구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중국과 해외 각지에서 객가인과 연관이 있으면 필사적으로 자기들로 귀속시키기 좋아하는 객가인들은 손문이 원래 동관의 손가에서 분가해 나갔고, 동관의 손가는 당연히 객가라는 것이다.

객가인들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치명적인 약점은 역시 손문이 객가화를 구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객가인은 전통적으로 '宁卖祖宗田,不卖祖宗言'(조상의 논을 팔 수 있어도, 조상의 말은 팔 수 없다')는 말에도 보듯,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다. 손문이 정말 객가인의 후예라면, 객가의 본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중산에 태어나서, 객가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객가인이 아니라는 설에 더 무게를 두게 한다.

위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객가인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에 자부심이 강하고, 단결력도 대단하다. 그래서 흔히 객가인을  몇몇 한국 매체에는  '동양의 유태인'으로 소개하면서, 태평천국의 홍수전, 현대 중국의  손문, 등소평, 곽말약, 싱가폴의 이광요, 태국의 탁신, 홍콩의 세계적 부호인 이가성 등이 객가 출신이라고 전한다. 손문이 객가 출신인 것은 의문인 것은 이미 언급했고,  홍콩의 이가성은 객가인이 아니라 조산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오류는 중국인들 내부에서는 중국의 유태인으로 견주는 민족은 객가인이 아니라, 조산인으로 통한다. 객가인 스스로도 자신들의 단결력이 조산인보다 못하다고 비평하는 문장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유태인은 아인스타인같은 과학자나 리스트같은 음악가도 있지만  근본은 상인이다. 상인으로서의 재능으로서 중국에서 알아주는 민족은 객가인이 아니라, 조산인이다. 물론 전통의 산서상인이나, 현대의 온주상인 같은 대륙 내부에서는 더 쳐주는 집단도 있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 인구비례상 가장 상업과 사업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이가성을 필두로 하는 조산인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홍콩에 가면 이름난 식당은 조주식 식당이 다수이다. 전국 각지의 많은 이주인구들이 밀집한 심천에서도 중소상인의 다수는 조산인이다. 동남아 각지에서 광부인이나 객가인에 비해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기업가수들은 그에 밀리지 않는 집단이 조산인이다. 조산인이 또 하나, 유태인과 유사한 점은 매우 진취적이고, 적응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조산인은 원래 복건성 남부의 민남인과 같이 민남어를 사용하는 집단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이 민남화 인구들은 주로 해안으로 따라서 계속 남진하여, 뇌주반도, 해남도(중국에서 좁은 지역에 가장 복잡한 방언분포를 보이는 지역이다.) 계속해서, 동남아 각지로 해상 활동을 통해 진출한 선두적인 민족이 바로 이들 민남화사용자들이다. 조산화는 민남화에서 비교적 일찍이(약 1600년 전) 분리되어서, 광동성 조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여서, 이제는 민남화와는 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 독자적 방언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조산인이 유태인과 다른 점이 있으니, 이들은 온주인(상해의 대부분 부동산과 상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대 중국 최고의 상인집단이다. )과 마찬가지로 자녀의 학교교육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일할 나이만 되면,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빨리 장사를 시작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게 이들의 사고 방식이다. 때문에 매우 유교적이고, 전통적인 교육을 중시하는 객가인이 관계나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과는 대비되게,  사업이 아닌 다른 정치, 학술, 예술 분야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이가 적다.

객가인은 인구수로도 조산인을 압도하지만(객가 인구를 전세계 약 5천만으로 조산인을 천오백만으로 추산한다.), 등소평, 이광요, 탁신, 그리고 현재의 광동성장 황화화를 비롯해서, 교육을 통해서, 자녀를 출세시키는 데 관심이 많은 부모들의 덕분으로 관계나 학계에 널리 이름을 떨친 이가 많다.

객가인은 조산인이나 광부인 못지 않게 널리 세계 각지에 퍼져 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중국 성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어떻게 보면 객가인들의 성격을 보면, 약간 의외의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객가인은 전형적인 농경민족으로, 전통과 자기가 사는 고장을 중시하는 정착민족이다. 객가인의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복건성 영정에 가면 객가인들의 대표적 건축물로 소개하는 토루가 있다(필자도 오토바이 꽁무니에 앉아 2시간 동안 산길을 헤매어 찾아간 적이 있다). 이 토루는 외부의 비적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의 지키기 위해서 만든 공동주택으로 한 세대가 아니라, 대대로 이어가면서 계속 보수하면서 지어진 것이다.

객가인의 이주사는 조산인이나 민남인의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성격과 달리, 역사적인 탄압을 피한 수동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광주 출신인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중요 구성원 대부분이 객가인이었고, 결국 남경에서 참혹한 패배를 끝으로 청조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는 광동의 객가들을 전국 각지로 동남아 곳곳으로 이동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사천, 호남, 강서, 절강 등지의 객가촌(등소평, 곽말약 등이 태어난 사천의 객가촌 등)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로 볼 수 있다.

3.
   한국인이 처음 보통화를 배우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음식을 먹다를 '먹을 食'자를 쓰는 게 아니라, 吃라는 평소 보지 못한 글자를 쓰는 것이다. 따라서 밥을 먹다는 '食飯'이 아니라, '吃饭'이 된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중국어 선생에게 질문을 하면, 너희는 옛날의 문어인 한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대 중국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를 배우고, 현대 구어에서는 그렇게 말한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배운 한국인이 다시 홍콩이나 광동성에서 와서, 흔히 광동인이라고 칭하는 광부인들이 밥을 먹을 때 쓰는 말을 들어 보니, 웬지 '쌕판'하는 것 같다. 즉, 吃饭이 아니라,다시 '식반'이다. 그러므로, 광부화에서는 옛 문어라고 배운 것이 바로 아직도 구어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광동성 밖의 지역이나, 외국에서 광동성에 온 사람들은 광동성의 방언이 얼핏 다 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광동성의 방언을 광동화라고 통칭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광동성 현지인(중국인들은 本地人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들은  '광동화= 광부화'라는 등식에 동의할까? 광동성 내 객가인과 조산인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광동성 본지인들 사이에는 광동화(cantonese, canton은 광동의 광부화식 발음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라고 하지 않고, 白话(빠이화, 광부화에 대한 속칭, 원래 白话는 문어가 아닌 일상구어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광부인들의 일상구어가 광부화이기 때문에 광부화를 백화라고 칭한다는 설이 있다)라고 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흔히 통칭되는 광동화는 광부인들의 광부화(广府话)인 것이다. 광부인들의 광부화가 광동화로 알려진 것은 광동성 내 이들의 인구가 제일 많고,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광저우)와 외부에 널리 알려진 광동성을 대표하는 도시인 홍콩(짐작하듯이, HongKong 역시 광부화의 香港에 대한 영어식 발음이다. 정확한 광부화 발음은 '헤엥꽁'처럼 들린다.)에서 광부화가 가장 널리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광동성 내 대표적인 세 방언인 광부화, 객가화, 조산화는 외부인들에게 비슷하게 들리는 걸까? 답은 앞의 서술한 고대 한어의 문어가 그대로 구어로 사용된다는 사실과 관계 깊다. 즉, 광동성 내 세 방언은 주로 송대 이전의 고대 한어의 유산을 아직도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성조에 입성(한문이나 국어 시간에 들었던 '평상거입' 중 바로 마지막 성조에 해당하는 입성이다)이 남아 있고, 낱말로 많은 고대 문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필자도 광부화, 객가화, 조산화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고, 겨우 광부화를 조금 배워 본 수준으로 혹시 잘못 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이들 세 방언은 고대 한어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언어학에서 말하는 '변두리 원형보존의 법칙'이라고 하는 게 작용해서 인 것으로 보인다.

  영어사를 배우다 보면, 상식적인 생각과 반대로, 셰익스피어 시대 영어 발음과 가까운 영어는 영국식 영어가 아니라, 미국영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400년 전 이민을 떠날 때 영어 발음을 그대로 가지고 떠나서,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미국인이고, 영어의 중심지였던 영국에서는 이 후 계속 변화해서 고대 영어와 발음이 많이 바뀐 것이 영국영어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배우는 한자의 발음도 대부분 고대 한나라 혹은 당나라 시대 발음이고, 현대의 보통화 발음과는 많이 다르다. 오래 전 이미 세종대왕이 '나라 말싸미 듕귁에 달아'가 아니라 한자 발음이 중국과 달라 '어린 백성'에게 바른 한자발음을 가르치러 일종의 음가부호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광동지역의 방언을 공부하면, 보통화를 배울 때와 다르게 우리의 한자 발음과 친근한 발음이 많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오늘부터라도 동관카페의 회원 여러분들은 막연히 광부화나 객가화가 어렵겠지라는 생각보다 한국어와 친근한 한자 발음이 많다는 점을 위안 삼아 도전해 보기 바란다. 물론,  첫 도전 중에 필자처럼 높낮이가 아리송한 광부화의 6개 성조(혹은 입성에 의해 파생되는 3개의 성조를 구분한 9개의 성조가 있다고도 한다)와 한 낱말에 성조가 고정되지 않는 문제, 괴상한 백화 특유의 한자(미남, 미녀를 뜻하는 靓仔,靓女와 같이 한국인에게 생소한 한자를 쓰는 것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예 보통화에는 없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한자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광부화만을 위한 자판도 있다. 광부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운로드 받아서 사용해 보시길...)들에 질러서 포기하는 분들도 많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면 광부화, 객가화, 조산화는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왜 서로 간에 소통되지 않는 방언이 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실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사용인구의 생성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포괄적인 답이 될 수 있다. 광부화를 사용하는 광부인은 B.C 2세기 경부터 시작된 한대 군사들의 정복활동 이후  광동 지역의 남월족(백월계 민족의 남부지파)와 혼혈되어서 대대로 광동지역에 살아 오면서 발전하였다. 반면 조산인은 원래 복건성 지역에서 대략 A.D. 4세기 이후 남북조 시대(한나라 멸망 뒤 삼국 시대를 지난 시기)부터 활발히 시작된 이 지역에 대한 한족들의 개척과 군사활동 이후, 이 지역 토착의 민월(백월계 민족의 복건 쪽 분파)와 기타 묘요계 원주민과 혼혈되어서 민남인이 형성 된 뒤, 다시 이들 민남인들 중 일부가 광동지역 월동의 해안지역 조주,산두, 게양 등으로 이주하여 조산인을 형성한 것이다.

  객가화와 객가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생성시기가 가장 늦다. 이들 객가화는 강서지역의 감방언(赣语,赣이라는 복잡한 글자를 평소 광동지역에 지나가는 차번호판을 유심히 본 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감은 바로 강서성을 가리키는 약어이다. 광동성과 인접한 때문인지 강서성에서 온 차들이 많이 보인다. 광동성은 남월(南越)을 뜻하는 粤(보통화로는 '위에',한자 독음은 역시 '월')이 약어이다. )과 더불어 대체로 송대 이후에야 생성된 것으로 본다. 객가라는 부류는  비록 전국시대부터 꾸준히 남방으로 내려온 한족의 일파와 연관이 있을 지 모르지만, 이들이 본격적으로 광동지역에 자리 잡고, 현재의 객가인의 후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형성시킨 것은 송대 이후로 보는 것이다.

  송대에 아마 광동성 동부 내륙 매주(매현을 중심으로 하는 광동성 동부 매주, 하원, 혜주) 일대에서 한족의 이주민이 정착하고 이들 이주민이 주로 현지의 서요족(묘요계 민족)과의 혼혈을 통해서 객가어가 생성된 뒤, 이후 이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부침에 따라 다시 전국 각지와 세계로 퍼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국의 어떤 아마추어 역사연구자가 주장하는 '객가인이 묘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한 20% 정도는 맞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 묘족과 서요족은 다른 민족이고, 객가인 스스로가 묘족에 대해 어떤 관련성을 부인하고, 한족이라 주장하는 데, 멀쩡하게 호남성과 귀주성에 남아 있는 묘족을 두고, 객가인을 묘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광동성 지역의 본지인이 형성된 배경을 보면, 왜 그들이 같은 한족이면서도 다른 북방의 한족보다 평균키가 작거나, 피부가 다소 검거나, 동남아인과 닮은 사람이 많은가라는 의문도 풀리리라 본다. 물론 홍콩의 배우나 가수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광부인이나 객가인, 조산인 중에서도 키가 크고, 윤곽이 뚜렷한 사람도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윤발이형, 주윤발은 객가 출신이고, 진혜림이나 유덕화는 광부인이다(여명은 원래 북경인이다.어린 시절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대체로 광부인이 세 민족 중 가장 키가 작고, 피부가 많이 검다. 아마도 광동지역에 정착한 역사가 가장 길고, 토착 민족과의 혼혈도 많아서 그럴 것이라 짐작된다.

   사실 광부화는 광서장족자치구의 장족의 언어와 유사한 점이 대단히 많다고 한다(어떤 이는 광부화가 베트남어와 비슷하고, 보통화로 완전히 표기하든 힘든 음가도 베트남어로 광부화를 거의 완전히 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엄밀히 말하면 베트남인의 다수를 구성하는 경족은 남월계의 다른 민족보다 묘요계에 가깝다.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아직 검증이 필요하다 ). 광부인 중에는 한족과는 전혀 관계 없는 장족이나 기타 민족의 조상 중 누군가가 한족으로 편입된 뒤 후손들도 저도 모르게 한족이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객가인이나 조산인도 정도의 차는 있을 지언정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해혁명 이후 한 양심적인 중국 학자가 호남성(개인적으로 중국에서 한족과 다른 이민족이 만나 문화적 역사적으로 가장 풍성하고 흥미로운 유산을 낳은 곳으로  광동, 사천, 호남으로 생각한다. 호남의 약어는 湘江을 따서 湘이고, 호남의 여자들을 湘女라고 부른다. 상녀들은 대체로 소항(소주와 항주)의 미녀들보다 미모는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미모를 커버하기 위함인지(?),'湘女多情'이라는 말에서 보듯 무엇보다 남자들을 애뜻하고 살뜰한 정으로 사로 잡는다는 평이 있다. )의 인구를 족보별로 추적해서 자세히 연구한 후, 호남성 한족의 대부분은 실은 묘족이나 기타 다른 소수민족이 한족으로 참칭한 가짜한족이라는 논문을 내 놓은 적이 있다. 아마 호남성보다 더 남쪽의 광동성도 이런 현상이 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짜한족이라는 표현은 결코 순수한족이 우월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가치 판단을 포함하지 않는다. 실제 북방의 한족들도 순수한족이라기보다, 오호십육국, 요,금, 원, 청 등의 왕조들로 이어지는 북방유목민족이  지배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흉노나 선비, 거란, 말갈, 몽골 등 수많은 북방민족이 혼혈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심지어 전국시대 전국 7웅 중 하나에서 중국을 통일한 진이나 중국인들이 정통 한족 왕조 중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것으로 자랑하는 당왕조(그래서 해외에 중국인 화교들이 사는 곳을 중국어로 唐人街라 한다.)의 왕실도 실은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것도 중국외 국제학계에서는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물론 중국 국내 교과서나 역사시간에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설사 누군가가 부계로 한족 혈통을 받았다 하더라도, 모계는 거의 토착민족에서 기원한 것이며, 유전자 중 단지 부계의 일부만 남아 있는 표지를 가지고, 자신은 진짜 한족이라고 우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북방에서 유래하니 우수하고, 남방기원이면 열등하다는 것도 사고방식도 문제가 있다. 흔히 우리 한국인들도 자신들의 조상은 북방의 시베리아나 몽골에서 유래했다고 여기고,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해서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유전자인류학의 연구결과에도 밝혀 지듯이, 한국인들의 유전자도 모계는 물론, 부계에도 중국 한족의 주류인 O3(아마도 족보에 조상 누구가 중국에서 왔다는 서술이 정말 사실이 가능성이 크거나, 원래 동이족인 우리 민족이 일부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하고 일부는 중국에 남은 결과일 수도 있다.)와 인도 동부와 방글라데시 지역에서 갈라져 나온 O2와 같이 남방계라 칭할 수 있는 부류가 다수이고, 몽골인과 유사한 C나 중앙아시아인의 N은 비교적 소수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 기회에 다시 써 보기로 한다.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말했듯이, 돈키호테와 같은 하위 기사계급의 가짜귀족들이 오히려 중세 봉건제를 고위 귀족들보다 더 완강하게 고수하고, 봉건제의 붕괴에 대한 저항이 강렬했다는 것은 서양역사에서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 청조의 역사를 보면, 광동성에서 유사한 현상이 일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즉, 광동성의 한족 같은 가짜 한족들이 북방의 한족들보다 오히려 더 완강하게 만주족의 청조에 저항하였고, 정통 한족 정권의 복권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반항의 과정의 산물인 천지회나 청방 같은 조직들이 오늘날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광동성과 세계 각지의 화교사회에서 해만 지면 '우리들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어둠의 세계에서 낮의 세계까지 조종하려는 삼합회 같은 조직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역사가 남긴 아이러니에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4.

 

   동관 동남쪽에 당하진, 장목두진, 봉강진, 청계진, 황강진이 있고, 지금 동관시에서 동남쪽에 새로운 구를 설치하려 하는 데, 이 다섯 개의 진 중 어디에 행정중심을 설립하느냐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 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다섯개의 진 중 외부에 잘 알려지고, 발전한 곳은 장목두진(쟝무터우)이다. 장목두진이 발전한 이유는 홍콩과 심천, 광주를 잇는 철도의 정거장이 자리한 것과 관계 깊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많은 홍콩의 상인들이 장목두에 자리잡아서, 서쪽의 후가진(厚街,호우지에)을 '소대만'이라 일컫는 것과 같이 '소홍콩'이라 불리고 있고, 소비수준이나 물가도 다른 진보다 높고, 장목두에 있는 좋은 아파트들은 대부분 홍콩사람 소유이다 .

    재작년에 이 장목두진의 진장(한국의 군수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 중국에서 각 행정단위의 장, 예를 들어, 광동성장, 동관시장이라 불리는 인물이 그 행정단위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인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광동성 당부서기나 동관시 당부서기 등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인물이 성장, 시장, 진장 등을 맡는다. 따라서 현재의 광동성장 황화화은 광동성 당부서기 겸 광동성장이고, 구속된 이위민도 장목두진 당부서기 겸 진장이었다. 현재 광동성 서열 1위 당서기는 장덕강으로 김일성대학에 유학한 경력이 있어 한국어가 유창하다. 재작년 김정일이 광동에 왔을 때도 그가 직접 안내를 맡았다.)이었던 이위민이라는 인물이 뇌물수수와 공금유용 혐의로 구속되었다. 횡령액수는 대략 1.1억원(한국돈 140억원)정도라는 데, 특이한 것은 이 중 80%가 넘는 9천만원을 마카오에서 도박으로 잃었다는 것이다.

  경찰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위민은 당초 인근 당하진 부진장으로 있을 때부터, 장목두진장으로 재직한 5년 동안 매년 평균 60차례가 넘게 마카오에 가서 도박을 하였고,  그 중 어떤 때는 한 달에 17차례 마카오에 가서 도박을 벌였다 한다.  참으로 상식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한달에 17차례나 출근도 않고, 마카오로 가서, 도박을 벌였는 데도 진장직을 5년이나 유지하고 있었는 지...아무튼 이렇게 사람이 많이 살다보니 기상천외한 일이 잘 벌어지는 곳이 중국이다.  얼마 전 거래하는 서울의 회사  대리가 중국에 한 임업공무원이 산을 녹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산 전체를 녹색 페인트를 칠했다는 보도를 보았는 데, 이게 사실이냐고 물어 왔다. 중국은 하도 사람이 많아서,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진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사설이 좀  길었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인 광동성의 종교는  마카오라는 도시 이름과 관계 있다. 각종 도박장으로 유명한 이 도시를 우리는 마카오라 하는 데, 중국 사람들은 澳门이라 쓰고, 보통화로는 '아오먼'이라 읽는다. 이전에 글에 썼듯이, '헤엥꽁'을 HongKong이라 부르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되는 데, 왜 '아오먼'을 마카오라 부르는 지는 잘 이해되기 어렵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오해가 발단이 된 사연이 있다. 마카오는 아시다시피 포르투갈인들의 식민지였다. 이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마카오에 배를 타고 와서, 도착한 곳은 우연히도 '천후'라고 불리는 마조(马祖)의 사당이 있는 곳 근처였는가보다. 포르투갈인들이 현지 광부인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광부인은 그가 배를 모는 선원이라서 마조의 사당에 참배하려는 줄 알고, 마조의 광부화 발음인 'macau'을 반복해서 말했다. 포르투갈인은 그것을 지명으로 알고, 원래 '澳门'을 '마카우' 혹은 '마카오'라고 부르게 된 것이 마카오라는 지명의 연원이다.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이 식민지 지배자들의 오인된 지명을 그대로 부를 리 없고, 자기식대로 계속 오문이라 부르는 반면,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이 도시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마카오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일본해를 우리만 동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의 일이다. 하여간, 중국인들이 외부의 '홍모귀'(서양인들이 몸에 털이 많다고 해서, 중국인들은 이들을 처음 이렇게 불렀다.)들도 마조의 위력을 안다고 착각할 만큼 중국의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널리 퍼진 신앙이다.

  공산당 지배하의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종교는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서울과 같이 도시 내에서 눈만 돌리면 마주치는 교회가 중국에는 거의 없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한국처럼 명승지마다 있는 중국의 절이라는 곳에 가 보면, 중국 불교의 스님은 웬지 참선하고 불도에 정진하는 존재보다는 무술영화 소림사에 나오는 승려들처럼 쌈박질에 능하고, 고기도 잘 먹을 것 같은 엉터리 중 일색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사람들 눈에 중국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이는 또한 사당 이름을 지명으로 착각한 포르투갈인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오는 편견일 것이다. 특별히, 광동과 복건 등 중국 남부 지방 사람들은 중국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들의 종교는 포괄하여 도교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


   도 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정의하기 어려운 것은 인도인의 종교인 힌두교가 어떤 종교인가 정의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유명한 종교학자 미치아르 엘리아데는 종교를 현세를 넘어선 초월성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 데, 이렇게 보면 힌두교가 도교보다 더 종교적이고, 다시 말하면 초월적이다. 힌두교와 같이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다신교인 것은 도교도 마찬가지이나, 도교는 힌두교처럼 몇 십억년을 넘나드는 신들이 현세와 다른 신화세계 속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도교의 신화도 하늘의 옥황상제를 중심으로 여러 신들이 서열이 매겨지고, 인간세계와 다른 질서가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받들어지는 도교의 신들은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인물이거나, 혹은 실재 인물에서 모티브가 나오고 각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광동성에서 가장 널리 받들어지는 관우와 마조이다. 광동성 내 상점이나 공장을 가면 어김없이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청룡언월도를 거머쥔 관우의 상을 마주친다. 중국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많이 읽힌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듯, 관우는 원래 산서성(山西省, 우리말로 하면 산서성이 이웃한 섬서성(陕西省)이 잘 구분되지만, 보통화에서 둘은 똑같이 병음은 shanxi이다. 단지 성조가 산는 1성, 섬는 3성이다. 중국인들에게 이 성조라는 게 헷갈려서, 그리 훌륭한 변별자가 못되는 듯, 대다수가 산서성과 섬서성을 구분할 때, 두세번 성조를 확인하면서 말한다.) 출신이다.  필자가 우연히 산서성 출신 사람을 마주치면 꼭 묻는다. '산서성에서도 광동성처럼 곳곳에 관우상을 모시고,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 배례(한국의 상달 고사처럼, 관공 상 앞에 음식과 술을 차린다. 단지 다른 점은 가짜 돈을 태우는 무지 태우는 것이다.)를 거행하면서, 숭배하느냐? ' 대다수 산서성 사람들이 자기들 고장에서는 여기 광동처럼 관공( 그냥 관우가 아니다. 关公이라고 해야 한다.)을 모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왜 관공에 대한 신앙은 광동성을 포함한 남부지역에서 오히려 그의 출신지인 산서성보다 더 열렬히 숭배되어진 걸까? 흔히 관우가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숭배된 이유로 진상(晋商,진은 산서성의 약어이다. 전국시대 이지역에 위치한 진나라에서 유래했다. 진상은 얼마 전에 CCTV에 방영된 '교가대원'의 교가를 필두로 하는 산서성의 평요현 중심으로 활약한 명,청 시대 안휘성의 儒商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상인집단이다.)이 중국 각지에 상업활동을 하면서, 자신들 고장 출신의 관우를 숭배하는 풍습을 퍼트렸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단순히 진상의 상업활동이 활발해서, 진상과 같이 부자가 되고 싶어 관우를 이토록 숭배한다는 것은 다소 부족한 이유처럼 들린다.

   유대인 작가로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위젤이 쓴 <벽 너머 마을>이라는 책에 보면 읽은 지 오래 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랍비 수련을 받은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이 '신이여, 내가 어떠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도록 내 곁에 머무소서'라고 말한다. 옆에 있던 한 랍비수련생은 이어서 아주 진솔한 고백을 한다. ' 신이여, 내가 설사 고난에 지치고, 유혹에 넘어가 당신을 부정하는 순간에도 내 곁에 머무소서'라고 한다. 사실, 후자의 신앙고백이 더 근원적인 울림이 있다. 예전에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인간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교회에 가서, 절에 가서 단지 자신의 현세의 행복을 기원한다고 비판하는 심오한 종교주의자를 포함해서 이다.

   관우는 그의 의형제이자 주공인 유비가 조조의 위협때문에 나몰라라 그를 버리고 떠나서, 조조가 유비보다 휠씬 나은 대우를 약속했음에도 아무런 영토도, 군사도 없는, 지략이나 투지에 있어서도 조조에 미치지 못하는 유비를 위해, 조조의 권유를 물리치고, 유비를 향해 떠난다. 그야말로 의리의 화신이다. 중국인들이 왜 그토록 관우를 숭배하는가하는 것도 이 의리라는 것과 깊이 연관이 있다. 이 의리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못난 존재이고, 내가 설사 먼저 배신을 하더라도, 관계없이 처음 맺은 약속대로 끝까지 나를 보호해 주고,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우는 <벽너머마을> 속 랍비수련자의 진솔한 신앙고백이 요구하는 신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광동성의 풍습 중에 타소인(打小人, 소인을 때린다는 의미)이라는 매년 경칩에 행해지는 어떻게 보면 아주 유치한 풍속이 있다. 평소 자기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거나, 원한을 살 만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쓴 종이나 사진 등을 나이 든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때리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궁정사극에 <장희빈> 등을 보면 자기가 미워하는 인물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꾹꾹 찔러 대는 것과 유사하다. 일종의 대리 복수이다. 살다 보면 늘 내가 그에게 준 대로,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와 관계되는 사람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순과 부당한 대우가 쌓이고 쌓이면 한국인에게 잘 나타난다는 화병이 발생하고,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그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중국의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보면 가장 자주 만나는 주제가 바로 복수(报仇)이다. 중국인들에게 의리라는 서로 간의 믿음이 소중한 만큼 이 의리를 위반한 사람에 대한 징벌도 중요하게 된다. 관우는 이런 면에서도 확실한 복수의 화신이다. 관우가 손권의 장수 여몽에게 죽임을 당한 뒤, 여몽은 얼마 안 가 매일 밤 나타난 관우의 귀신에 시달리다 죽고, 관우를 사지로 내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조조도 관우의 혼령에 시달리다 죽는다. 즉, 관우에게 빌면 의리를 배반한 이에게 확실한 복수를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by chojae | 2009/02/01 18:18 | 중국지역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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